지진의 그림자, 지하에서 터지는 재난
지진은 흔히 건물의 붕괴나 도로의 파손 같은 '보이는 피해'로 인식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하 인프라의 손상에서 시작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혈관 수도관과 하수도, 송수시설이 지진의 충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지진이 발생하면 땅은 단순히 위아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수평 방향의 전단 운동, 비틀림, 단층 이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 때 지하에 매설된 수도관은 휘고, 찢기고, 끊어진다. 지진 직후 급수망이 붕괴되면, 생활용수는 물론 소방, 병원, 위생 등 모든 도시 시스템이 동시에 마비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전력이나 통신망의 끊김은 금세 드러나지만, 수도관은 지하 깊숙이 감춰져 있고, 손상이 드러날 때는 이미 물난리나 단수 사태로 번진 뒤다.
그렇다면 수도관은 왜 이렇게 취약하며, 지진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일까?
수도관은 왜 지진에 약할까?
도시의 수도망은 보통 지하 1~3m 깊이에 매설되어 있다. 이는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이지만, 지진이라는 강력한 자연현상 앞에서는 오히려 약점이 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연성 부족한 재료 사용
오래된 수도관은 대부분 주철(ductile iron)이나 아스베스토스 시멘트관으로 제작되었다. 이들 소재는 지진 하중에 취약하며, 이음부에서 쉽게 파열된다. 특히 관 이음이 딱딱한 경우에는 땅이 미세하게 움직이더라도 깨지거나 틈이 생긴다.
② 비탄성 지반과의 충돌
지반은 지진 시 다르게 움직인다. 두 지점 사이의 토양이 각각 다르게 흔들리면, 그 사이에 연결된 수도관은 비틀림, 장력, 압축력을 동시에 받는다. 이는 굽거나 휘지 않는 강성관에 치명적이다.
③ 액상화와 침하
앞선 시리즈에서 설명한 액상화 현상은 수도관에 가장 큰 피해를 준다. 지반이 진흙처럼 흐를 때, 그 위에 있던 수도관은 아래로 가라앉거나, 들려올라가며 파열된다. 이때 관이 끊기거나, 반대로 떠오르면서 지상 구조물과 부딪혀 피해를 키운다.
④ 노후화된 매설 방식
1980년대 이전에 설치된 수도관은 내진 설계 개념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특히 이음 방식이 조임식(bolted joint)일 경우 지진 하중에 매우 취약하다. 현재도 전국에서 약 30~40%의 수도관이 3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사례: 눈에 보이지 않는 대혼란
● 고베 대지진 (1995년)
5,000명 이상이 사망한 고베 대지진은 수도 인프라의 붕괴가 재난을 더욱 악화시킨 대표 사례다. 당시 고베 시 전체 급수망 중 60% 이상이 파열되었고, 지진 발생 10일이 지나도 시민의 70%가 물을 공급받지 못했다. 피해 지역에서는 소방차조차 사용할 수 없었고, 화재 진압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2011년)
규모 6.3의 지진이 중소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를 강타했을 때, 전체 상수도관의 약 50%, 하수관의 약 80%가 손상되었다. 지진 이후 약 3개월간 시민들은 임시 급수차와 야외 화장실에 의존해야 했으며, 위생 문제로 2차 전염병 우려까지 번졌다.
● 포항 지진 (2017년)
한국의 포항 지진 당시, 흥해읍 지역의 수도관 일부가 파손되어 다수의 가구가 단수 피해를 입었다. 이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지진에서도 수도 인프라가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큰 규모였다면 광역 단수로 이어질 뻔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 수도관의 내진 현실
대한민국의 수도 인프라는 급격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노후 수도관의 비율이 높다.
환경부와 각 지자체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수도관의 약 35% 이상이 30년 이상 경과한 것으로 조사되며, 특히 광역시·도시 외곽 지역의 경우 노후 비율이 50%를 넘는 곳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수도관 대부분이 내진 설계 기준 없이 시공되었다는 점이다.
지진 위험도를 고려한 연성관(ductile pipe), 플렉시블 조인트, 내진 이음관 등의 적용률은 극히 낮으며, 아직도 리뉴얼 사업은 수도권 일부 지역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매설 위치의 정확한 데이터가 디지털화되어 있지 않거나, 지반 특성과 연결된 정보가 누락된 경우도 많아 복구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이 더 소요된다. 이는 지진 대응뿐 아니라 평상시의 유지보수에서도 치명적인 취약점으로 작용한다.
수도관 손상이 도시를 마비시키는 이유
수도관이 파열되면 단순히 물을 못 쓰는 문제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2차 재해로 확산될 수 있다:
- 소방 활동 마비: 화재 진압에 필요한 소화전 수압이 급감
- 전염병 위험 증가: 위생시설의 마비로 오염물 노출
- 교통 혼잡: 도로 밑 지반이 약화되어 함몰 발생
- 전력·통신 인프라 영향: 지하 공동구와 접촉해 2차 파손
- 경제활동 중단: 공장, 식당, 병원 등 산업시설 가동 불가
도시는 상호 연결된 생명체와 같다. 수도망은 그 생명체의 혈관이며, 그 혈관이 끊기면 도시라는 몸 전체가 기능을 잃는다.
일본과 미국의 선진 사례
● 일본
일본은 도카이 대지진, 한신 대지진 등의 피해 이후, 전국 수도망에 대해 내진성 평가와 보강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특히 도쿄도는 모든 주 배수관에 대해 플렉시블 이음 방식과 연성 소재를 도입했고, 재난 발생 시 자동으로 차단되는 지능형 밸브 시스템도 확대 중이다.
또한 수도관 매설지도를 GIS 시스템으로 완벽히 디지털화해, 지진 발생 시 응급 복구 시점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 지진 위험지대에 있는 미국의 도시들도 지진 전용 수도관 기준을 별도로 설정했다. 지반 침하 또는 단층 이동에 대응할 수 있도록 신축 가능한 이음관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요 기반시설에는 지하탱크와 우회 송수관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히 복구를 빠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진 직후 ‘72시간의 골든타임’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정책적 접근
- 노후 수도관 교체 예산의 우선순위 재조정
단순 노후도 기준이 아닌 ‘지진위험도 + 지반조건 + 인구밀도’를 반영한 종합 지표를 바탕으로 교체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 - 전국 단위 내진 평가 및 공개
지자체별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내진 평가를 국가 차원의 통합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며, 시민 누구나 지도상에서 자신의 지역 수도망 위험도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지진 대비 훈련에 상수도 대책 포함
현재까지 시행 중인 지진 대피 훈련은 주로 인명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급수망 붕괴 대응까지 포함한 복합 재난 훈련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 시민의 인식 변화
- 자신의 거주 지역 수도관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일이 시작이다.
- ‘비상 급수 키트’나 ‘임시 정수용품’을 구비하는 것도 실질적인 대비가 된다.
- 무엇보다도 지역 내 내진 설계가 미비한 공공시설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민 참여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응하는 법
지진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위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지하의 균열이 더 오래, 더 깊게 도시를 마비시킨다. 수도관은 도시라는 유기체의 혈관이다. 그 혈관이 끊긴다면, 도시의 모든 기능은 단 몇 시간 만에 정지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보이지 않기에 잊히기 쉬운 것’일수록, 우리는 더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지진을 예측할 수는 없어도,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가 지하를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도시 지하철과 지진, 터널은 안전한가?’를 주제로, 지하 깊은 곳을 달리는 대중교통 인프라가 지진에 얼마나 안전한지, 실제 사례와 위험 요인을 분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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