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딛고 사는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이 땅을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그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2016년 경주 지진, 2017년 포항 지진, 그리고 반복되는 여진들은 한국이 더 이상 지진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지진의 강도가 아니라, 그 진원 아래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단층’의 존재다.
지질학적으로 단층은 지각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지면서 생긴 균열이다. 이러한 단층이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지진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 단층들이 도심 한복판, 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을 통과하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사는 아파트, 병원, 학교 아래에 단층이 지나고 있다면, 그 의미는 단순한 과학적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도심과 단층이 겹쳐진다는 것의 의미
도시와 단층이 겹쳐졌을 때의 위험은 단순히 지진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도시는 인구 밀도가 높고, 고층 건물, 전력 설비, 교통망, 가스관, 통신 인프라 등 수많은 복합적 시스템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층이 미동을 보일 때, 그 여파는 곧 도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예컨대 병원이나 소방서, 통신시설 등이 활성 단층 위에 지어졌다면, 재난 대응 자체가 마비될 수 있다. 재난은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의 위기이기에, 도심 속 단층의 존재는 실로 중대한 사안이다.
한반도, 정말 안전한가?
한반도는 과거 비교적 안정적인 지각판 경계 안에 위치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 역시 활성 단층대에 포함되는 수십 개의 단층이 존재하며, 그 중 상당수가 인구 밀집 지역과 겹친다.
대표적인 단층만 살펴봐도 다음과 같다:
- 양산단층대: 경주와 포항을 통과하며, 두 차례 큰 지진의 진원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울산단층: 울산 및 부산 남부 지역을 가로지른다.
- 왕숙단층: 수도권 북부 구리, 남양주 일대를 통과함.
- 김해단층, 정선단층 등: 중부 및 영남권에 분포
이들 중 다수는 아직 '활성 여부'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실제 정밀 조사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수도권 인근에 위치한 단층들에 대한 지질학적 조사는 최근에서야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딛고 있는 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수도권과 단층, 그 위험한 겹침
서울과 수도권은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밀집한 지역이다. 그런데 2020년대 들어 왕숙단층, 일자산단층, 소래단층 등 서울과 인접한 활성 단층이 실체화되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왕숙단층은 남양주·구리 일대를 통과하는 단층대로, 지하철 연장, 왕숙신도시 개발 등 대규모 도시개발 프로젝트와 겹친다. 전문가들은 이 단층이 활성 상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소래단층 역시 인천 송도 지역을 지나며, 매립지와 단층이 만나는 복합 취약지대로 지적되고 있다.
만약 이 단층들 중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수백만 명의 생명과 재산이 단 몇 초 만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지역 대부분은 활성 단층 위에 건축 제한이 없고, 내진 설계도 최소 기준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이다.
세계의 사례에서 배우는 교훈
전 세계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심 위 단층과 마주한 도시들이 있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 위험을 다루고 있을까?
● 미국 — 샌안드레아스 단층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의 샌안드레아스 단층은 북미판과 태평양판의 경계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층 중 하나다. 이 단층은 로스앤젤레스 인근을 통과하며, 수많은 도시 기반시설 위를 지나간다. 미국은 단층 지대를 중심으로 ‘액티브 폴트 존(Active Fault Zone)’을 설정하고, 해당 구역 내 건축을 제한하거나 내진 설계를 대폭 강화한다. 고층 건물은 물론, 학교나 병원 등 필수 시설의 입지도 철저히 조정된다.
● 일본 — 도카이 지진 대비와 도쿄
일본은 전국적으로 약 2천 개 이상의 활성 단층을 공식 등록해 관리한다. 단층대 위에 있는 주요 도시들은 정기적으로 위험도를 평가받고, 그에 따라 내진 기준, 피난 계획, 도시개발 프로젝트가 조정된다. 특히 도카이 지역은 장차 큰 지진이 예상되는 지역으로, 정부 차원의 특별법까지 제정되어 대응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왜 단층 위에 도시가 생겼는가?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위험하다면 왜 애초에 단층 위에 도시를 지었을까?
그 이유는 단층이 지나가는 지역이 대부분 지형적으로 평탄하고, 하천이나 연안이 가까워 물자 운송이 용이하며, 인간 생활에 적합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도시부터 현대 신도시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실제로 고대 로마의 여러 도시들도 단층대를 따라 지어졌고, 현재 세계 주요 도시 중 상당수도 단층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즉, ‘단층 위 도시’라는 개념은 단지 실수나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인류의 도시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도심 속 단층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그 위에서 어떻게 더 안전하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 지질 정보 공개와 시민 알 권리 보장
시민이 거주지 또는 매입 예정 부지의 단층 위치, 위험 등급, 내진 설계 여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 건축 기준 강화와 내진 리모델링 지원
기존 건축물 중 다수가 내진 성능이 미흡하다. 정부 차원의 내진 리모델링 지원 정책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 단층지대 특별관리구역 지정
일본처럼 활성 단층 위 특정 구역을 지정해 건축물 높이 제한, 용도 제한, 공공시설 재배치 등 관리가 필요하다. - 재난대응 훈련과 시나리오 기반 계획 수립
단순한 지진 대피 훈련을 넘어, 단층 지대 내 복합 재난 시나리오를 고려한 실전 대응 훈련이 필요하다.
땅은 말이 없지만, 기록을 남긴다
단층은 수만 년, 수십만 년 동안 힘을 축적하고 있다. 그 안에 있는 에너지는 언제, 어떤 계기로 폭발할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도시가 조용히, 그러나 위험하게 단층 위에 서 있다. 도시는 생존의 공간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서 있는 땅의 이야기를 듣고, 그 속에서 안전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다음 편에서는 ‘지진과 수도관, 보이지 않는 물길의 위험성’에 대해 알아봅니다. 지하를 흐르는 수도관과 가스관은 지진에 얼마나 취약할까요? 도시 인프라의 또 다른 사각지대를 들여다봅니다.
'지진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 지하철과 지진, 터널은 안전한가? (1) | 2025.07.15 |
---|---|
지진과 수도관, 보이지 않는 물길의 위험성 (1) | 2025.07.14 |
지진의 그늘, 액상화 현상이란 무엇인가? (1) | 2025.07.12 |
지진의 깊이-지하 10km의 흔들림, 얼마나 깊어야 위험할까? (0) | 2025.07.11 |
지진과 동물의 감지 능력, 과학이 밝힌 본능의 경고 (2) | 202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