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학

지진의 그늘, 액상화 현상이란 무엇인가?

아침양갱 2025. 7. 12. 06:00

지진액상화

 

보이지 않는 위험, 지진 그늘의 실체

지진이 발생하면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모든 피해가 단순한 진동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지진의 숨겨진 위협 중 하나인 ‘액상화 현상’은 땅 자체가 마치 진흙처럼 변해버리는 지질학적 현상으로, 구조물 붕괴와 대규모 재산 피해를 유발한다.

액상화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대비도 어렵다. 더욱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도시 대부분은 하천 근처나 매립지 위에 건설되어 액상화에 취약한 지반을 가진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액상화의 원리와 실제 사례, 그리고 국가적·개인적 대응 방안에 대해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액상화 현상이란 무엇인가?

액상화(Liquefaction)는 지진과 같은 외부 충격이 지반에 가해질 때, 토양 내 입자 사이에 있던 물이 압력을 받으며 지반 전체가 액체처럼 변하는 현상이다. 특히 모래나 실트(silt)와 같이 입자가 작고 균질한 지반에서 발생 확률이 높다.

일반적으로 지반은 고체로서 건물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진의 진동이 지속되면 입자 간 마찰력이 감소하고, 간극수압이 상승하면서 토양이 일시적으로 액체처럼 유동성을 갖는다. 이로 인해 지반이 꺼지거나 구조물이 기울어지는 등 심각한 피해로 이어진다.

 

액상화 발생 조건

액상화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잘 발생한다.

  • 입자 크기가 일정한 모래나 실트질 토양
  • 지하수가 높아 포화 상태인 지반
  • 중강도 이상의 지진 진동
  • 지표면에서 가까운 얕은 지층

특히 하천변, 해안가, 매립지, 과거의 호수 바닥과 같은 지역에서 액상화 발생 빈도가 높다. 한국의 경우 한강 유역, 낙동강 유역, 동해안 매립지 등에서 위험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액상화 피해 사례

● 일본 고베 지진 (1995년)

고베 항 주변 매립지에서 대규모 액상화가 발생해, 수십 개의 건물과 항만 구조물이 기울거나 침하되었다. 당시 항구가 마비되면서 경제적 손실도 컸다.

● 동일본 대지진 (2011년)

도쿄만 연안의 지바현에서는 수백 채의 주택이 기울고, 도로가 갈라지는 등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인공매립지에서 피해가 집중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지어진 신도시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 포항 지진 (2017년)

규모 5.4의 중규모 지진임에도, 포항 흥해읍 일대에서 주택 침하 및 도로 균열이 발생했다. 이 지역은 하천 주변의 충적지로 구성되어 있었고, 액상화 조건을 충족한 지반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실질적인 위협이 입증된 사례다.

 

왜 위험한가? 액상화의 파괴력

액상화는 단순히 지반 침하에 그치지 않는다. 그 영향력은 다음과 같다:

  • 건물 붕괴 또는 기울어짐: 기초가 약화되어 구조물이 지탱되지 못함
  • 지하 기반시설 손상: 가스관, 수도관, 전력선 등 인프라 파괴
  • 교량 및 도로 단절: 교각 침하, 도로 함몰로 교통망 붕괴
  • 이차 재해 유발: 화재, 누수, 붕괴 등 복합 재난 유발 가능성

액상화는 흔들림 그 자체보다 오히려 지진 이후 회복력을 떨어뜨리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액상화 예측과 대응

● 예측 방법

  • 지질 조사 및 시추 테스트: 지반 구성과 지하수 상태 분석
  • 진동 시뮬레이션: 예측 지진 진동 강도에 따른 토양 반응 확인
  • 지진 위험지도 작성: GIS 기반 분석으로 액상화 위험 지역 도출

● 방지 기술

  • 지반 개량 공법: 고압 주입, 압밀, 동다짐 등을 통해 강도 증가
  • 배수층 설치: 공극수압 상승 억제
  • 말뚝 기초 구조물 설계: 심부 기초를 통해 안정성 확보

한국의 경우 2018년 이후 정부와 지자체에서 ‘액상화 우려지역’에 대한 조사 및 도시계획 지침을 수립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국 단위에서 체계적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의 액상화 대응 현황

포항 지진 이후, 국토교통부는 전국 매립지 및 충적지 지역에 대한 액상화 조사 사업을 확대했다. 특히 서울 마곡지구, 인천 송도, 부산 해운대 등 신도시의 지반 특성이 집중 분석되었고, 일부 지역은 내진 보강 공법을 적용 중이다.

또한 국토부는 지반 정보 플랫폼을 구축해 건축 인허가 단계에서 위험 여부를 사전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시스템은 여전히 전문가 중심으로 운영되어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포항 사례의 교훈

포항 흥해읍의 피해는 단순한 진동이 아닌 ‘지반의 특성’이 피해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임을 보여준다. 당시 주택 수십 채가 기울고, 골목마다 균열이 생긴 원인은 바로 충적층의 느슨한 지반 구조였다.

복구에는 수백억 원이 투입되었고, 주민들은 장기간의 임시 이주 생활을 겪어야 했다. 액상화는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삶의 터전을 흔드는 재난임이 명확히 드러났다.

 

해외 도시들의 대응 전략

● 일본

도쿄만 주변의 지바현, 가나가와현 등은 매립지에 대한 지속적인 지반 보강과 내진 설계를 강화하고 있다. ‘고밀도 다짐공법’, ‘지하 배수 시스템’ 등 특수한 공법이 도입되었고, 액상화 대응 지침은 일반 주택 시공 시에도 의무 적용된다.

●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도시 전역을 지반 위험 존으로 구분하고, 건축물의 내진 기준을 해당 존에 맞게 달리 적용하고 있다. 이는 시민이 주거지를 선택할 때 지반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고, 도시 전체의 리스크 관리 효율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기술이 바꾸는 액상화 대응

최근에는 위성 기반의 InSAR(간섭 합성 개구 레이더) 기술과 AI 기반 시뮬레이션이 결합되어, 액상화 위험 지역을 보다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지표면 높이 변화나 지하수 변동 등을 실시간으로 감지해 경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활용된다.

대한민국 또한 이러한 기술을 공공 사업에 시범 도입 중이며, 수도권 신도시나 지하 고속철도 사업(GTX) 등에서도 적용이 논의되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땅, 믿을 수 있는가?

지진은 단순한 흔들림 이상의 복합 재난이다. 그 중에서도 액상화 현상은 우리가 서 있는 땅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위협이다. 도시화와 기후변화로 지반이 더 약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이를 ‘드문 사례’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과학적 조사와 기술 도입은 물론, 시민 개인이 자신의 거주 지역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준비할 수 있는 체계적 환경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야말로 진정한 재난 대비의 시작이다.

다음 편에서는 ‘도심 속 단층 위의 도시들,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나?’를 주제로, 한반도와 세계 주요 도시들이 단층 위에 건설된 사례와 그 위험성, 그리고 대비책을 자세히 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