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은 우리에게 언제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갑작스러운 진동, 무너지는 건물, 그리고 이어지는 공포와 혼란은 그 누구도 쉽게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지진은 과연 지구에서 일어난 모든 지진의 일부일 뿐일까? 인류가 지진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시기는 고작 수천 년에 불과하며, 과학적 관측 장비가 등장한 지는 2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일어난 수많은 지진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글에서는 ‘잊혀진 지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가 기록하지 못한 지진들을 어떻게 찾아내고, 그 흔들림을 어떤 방식으로 추적하는지를 살펴본다. 고문헌 분석부터 지질학적 단서, 고고학적 유물까지, 지구의 과거 흔들림을 복원하는 과정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탐정의 일과도 같다.
기록되지 않은 재해, 인간의 기억 너머에 존재한 지진
고대 사회에서 지진은 흔히 신의 분노나 초자연적 현상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단순한 ‘사건’으로서의 기록보다는 상징적, 신화적 형태로 남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설형문자 기록에는 ‘도시가 무너졌다’는 구절이 반복되지만, 그 원인이 지진이었는지 전쟁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고대 일본에서는 지진을 ‘나마즈(巨大鯰)’라는 메기 괴물의 움직임 때문이라 여겼으며, 이로 인해 남긴 그림이나 설화가 지금도 전해진다.
기록 자체가 부족하거나 왜곡된 경우, 현대의 지질학자들은 ‘과거 지진 추정 방법(Paleoseismology)’을 통해 이 잃어버린 진실에 접근한다. 이 분야는 고지진학이라 불리며, 땅에 남은 단층의 흔적, 퇴적물의 교란, 지반의 불연속성을 분석해 수백, 수천 년 전의 지진을 복원한다.
단층 속에 숨겨진 흔들림, 지구가 말해주는 과거
단층대 주변에서 발굴된 지형의 단면은 마치 한 권의 역사책과 같다. 특히 단층 연대측정(Fault Dating) 기술을 활용하면, 땅속에 파묻힌 지진 단층의 마지막 활동 시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때 사용하는 대표적 기법이 탄소-14 연대측정법(Carbon-14 Dating)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양산단층에서는 겉보기에 평온한 평야 지형 아래 수십 차례의 고지진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퇴적층이 갑작스럽게 끊기거나 층이 어긋난 흔적은 분명한 지진의 증거다. 여기에 포함된 유기물에서 탄소 연대를 측정하면, 마지막으로 단층이 움직인 시점을 수치로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문헌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500년, 1000년 전의 지진 활동도 복원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의 영역을 넘어, 지진 위험 예측과 방재 전략 수립에 있어 핵심 자료로 작용한다.
바다 속 퇴적물, 잊혀진 해일 지진의 단서
지진이 해일을 동반한 경우, 그 흔적은 바다와 해안에도 남는다. 대형 쓰나미는 해안에 이례적인 퇴적물 층을 형성하는데, 이 퇴적층을 분석함으로써 과거의 지진 해일을 추적할 수 있다. 이를 지진해일 층서학(Tsunami Stratigraphy)이라 한다.
예를 들어, 일본 동북부 해안에서는 동일본대지진(2011년) 이전에도 수차례의 대규모 쓰나미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 연구진은 해안 저지대에서 발견된 모래층의 분포와 구성 성분, 두께 등을 정밀 분석하여 869년 조간 지진(Jogan Earthquake)이라는 고지진의 존재를 밝혀냈다.
이는 단순히 한 번의 학술적 발견에 그치지 않고, 해당 지역의 지진 재발주기를 예측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다시 말해, 잊혀진 지진을 발굴한다는 것은 미래의 재난을 예방하는 예측 과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유적과 문명, 무너진 흔적으로 남은 지진
지진은 인간의 문명에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고고학적 유적 중에는 분명한 흔들림과 붕괴 흔적을 지닌 구조물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전쟁이나 자연침식과의 구분은 어렵기에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그리스 크니도스(Cnidus) 유적과 페루 나스카(Nazca) 유적이다. 크니도스에서는 성벽이 일정 방향으로 기울어져 무너진 형태가 발견되었고, 이는 지진파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나스카 유적에서도 고대 건축물의 기반이 갑작스럽게 침하한 흔적이 남아 있어, 약 1500년 전 강진이 지역 문명 붕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지진이 단순한 자연현상을 넘어, 문명의 흥망과 도시의 이동, 문화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쳐왔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흔들림은 인간의 삶과도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고문헌 속 ‘은유’를 해독하다
고지진 연구자들은 고문헌의 한 줄 한 줄에서도 실마리를 찾는다. 역사서, 사찰 기록, 종교 문헌, 민간 구전 등에 남은 ‘특이한 현상’ 예를 들면 “산이 갈라졌다”, “하늘이 울었다”, “땅이 마을을 삼켰다”와 같은 표현을 현대 과학의 틀에서 재해석한다.
한국에서도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는 지진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1643년 조선 중기의 기록에는 “경상도 일대가 요동하고, 집이 흔들리며, 지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는 구절이 남아 있으며, 이는 분명한 단층 지진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문헌 분석은 정량적 수치로 남지는 않지만, 당시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진의 규모와 피해 양상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지질학적 데이터와 맞물릴 때 비로소 퍼즐이 완성되는 중요한 조각이 된다.
잊혀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지진의 흔적
지진은 땅의 움직임이자, 시간의 흔들림이기도 하다.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지진들은 문명의 구석구석, 땅속 깊은 단층 속에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그 흔적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과거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는 과학을 실천하고 있다.
고지진 연구는 단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대’라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날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보의 축적이다. 기억되지 못한 지진,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지진,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밝혀야 할 가장 조용한 경고일지 모른다.
우리는 지진을 경험한 직후, 도시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사진과 뉴스로 본다.
그런데 인공위성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땅의 변화까지 포착해낸다. 다음 41편에서는 '지진이 만든 땅의 흔적, 위성사진으로 본 변화의 기록’을 통해, 지구 관측 기술이 포착한 충격의 여운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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