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내진 기술과 시민 대응력의 차이
지진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도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포항, 경주, 최근의 제주 앞바다 지진까지—이제 우리는 지진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나라는 바로 일본입니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고 빠른 복구가 이루어지는 나라, 바로 일본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무엇이 다른 걸까요?
같은 자연현상 앞에서 왜 일본은 ‘지진에 강한 나라’라는 평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일본의 내진 기술과 시민들의 재난 대응력이 어떻게 쌓였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반복되는 참사 속에서 다져진 ‘지진 교육의 일상화’
일본은 지진의 나라입니다. 지각판 경계에 위치한 지형 특성상, 연중 수백 차례의 유·무감지 지진이 발생하며 대규모 지진도 주기적으로 찾아옵니다. 그렇기에 일본 사회는 일찍부터 ‘지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인식은 곧 사회 시스템의 근본부터 바꾸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일반 시민부터 정부까지 모두가 지진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조. 그것이 일본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인형을 머리에 올리고 재난 대피 연습을 하고, 학교에서는 지진이 발생한 가상 상황을 설정해 계단을 내려가는 훈련을 합니다. 회사에서는 월 1회 이상 재난 대피 훈련을 진행하고, 고층 빌딩과 쇼핑몰은 실제 대피방송과 함께 고객 대상 훈련을 정기적으로 시행합니다.
시민 대부분이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고 있으며, 이는 실제 지진 발생 시 패닉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게 움직일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단단한 건물이 아니라, ‘유연한’ 건물로 승부하다
많은 사람들은 지진에 강한 건물을 ‘단단하게 지은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와 다릅니다.
지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단함보다 오히려 유연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수십 년의 경험 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일본의 고층 건물들은 대부분 면진(免震), 제진(制震), 내진(耐震) 구조를 사용합니다. 이 세 가지 기술은 지진의 진동을 흡수하고 분산시키는 방식이 각각 다릅니다.
- 내진은 건물을 튼튼하게 짓는 전통적인 방식,
- 제진은 진동을 흡수하는 장치를 건물에 설치하여 흔들림을 줄이는 방식,
- 면진은 아예 건물과 지반 사이에 고무 받침을 두어 땅의 흔들림을 건물에 직접 전달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면진 구조는 특히 병원, 도서관, 박물관, 데이터센터 같은 ‘운영의 연속성’이 중요한 시설에 주로 적용되며, 지진이 발생하더라도 건물 안의 사람들이 흔들림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보입니다. 서울 도심의 고층 아파트들이 아직도 ‘내진’만을 고려한 설계라면, 도쿄의 대형 건물들은 이미 ‘면진+제진’ 구조가 기본 사양이 된 상태입니다.
하드웨어 못지않게 중요한 ‘소프트웨어’, 시민의 태도
내진 설계만 잘 되어 있다면 지진에 강한 도시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건축 기술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대응력입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쓰나미로 2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한 비극 속에서도 도쿄 시내의 인명 피해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리적 조건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훈련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지하철 승객은 안내방송에 따라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고,
- 대형 마트 직원은 진열대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고객들을 차분히 대피시켰으며,
- 회사원들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 천천히 이동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수십만 명이 귀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도시 전체가 극도의 질서를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편의점 물건이 도난당하거나, 대피소에서 다툼이 발생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평소 교육과 경험, 문화 속에 내재된 대응력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일본인은 지진이 ‘당연한 일’임을 알고 있고, 그래서 ‘당연하게 준비하고 당연하게 대응하는 태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의 역할: 실시간 대응 시스템과 정확한 정보 전달
일본은 지진 발생 직후, 수 초 이내에 전국 방송을 통해 “긴급 지진 속보”를 송출합니다.
이는 기상청과 지진관측소, 통신사, 방송사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 지진 발생 3~10초 전, 미세한 P파(초기 진동)를 감지하면
- 즉시 텔레비전, 라디오, 휴대폰, 열차 방송 등으로 동시에 경고 방송이 나갑니다.
이 시스템은 특히 지진의 진앙에서 떨어진 지역에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지진파가 도달하기 전 몇 초라도 빠르게 대피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거나, 자동차를 멈출 수 있는 ‘골든타임’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NHK와 민영 방송사는 긴급 상황 시 기존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지진 규모, 위치, 쓰나미 여부, 여진 가능성, 대피 경로 등을 시청자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즉시 시각자료로 제공합니다.
이처럼 정보 전달이 즉각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점은 공포가 아닌 이성적 대응을 유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지진 문화’를 만든 도시 인프라의 차이
도쿄 시내를 걷다 보면 거리 곳곳에 지진 관련 인프라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공 건물마다 대피소 표시가 있고, 공원 입구에는 이곳이 재난 발생 시 대피소임을 알리는 큰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도로에는 대피 경로를 따라가는 화살표나 유도선이 그려져 있으며, 신호등마다 지진시 자동 통제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지하철역에는 지진이 발생했을 경우 대피할 수 있는 비상공간이 따로 확보되어 있으며, 기둥마다 손전등과 마스크가 담긴 방재 키트가 설치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본의 ‘지진 문화’는 단지 사람들의 의식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하드웨어적 인프라와 일상적 시스템에 지진 대응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합적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일본은 ‘지진에 강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배워야 할 것들
한국도 최근 지진 빈도가 증가하면서 내진 설계 기준을 강화하고, 행정안전부 차원에서 ‘안전디딤돌’ 앱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멉니다.
- 학교와 공공기관에서의 정기적인 대피 훈련이 미비하고,
- 시민 대다수가 ‘지진 발생 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며,
- 아파트, 상가, 교회 등 민간 건축물의 내진 보강은 여전히 예산 문제로 미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일본이 겪었던 수십 년의 시행착오와 교훈을 미리 배우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세대입니다.
지금이 바로 ‘지진에 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변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하며
지진은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충분히 줄일 수 있습니다.
일본이 그랬듯, 우리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진을 두려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진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안전한 사회는 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준비된 자세와 문화, 그리고 반복된 훈련과 실천이야말로 지진이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도 사람을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지진을 대비한 도시 디자인,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를 주제로 건축, 도로, 대피소 설계까지 지진 친화적인 도시 인프라의 방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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