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그 충격은 단 몇 초 만에 도시의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의 일상을 뿌리째 흔든다.
하지만 더 무서운 사실은, 대부분의 피해는 지진 자체가 아닌 도시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는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지진은 피할 수 없지만, 피해는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진 친화적 도시 디자인’이다.
단지 튼튼한 건물을 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시 전체가 지진이라는 재난 상황에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고, 사람들을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총체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이번 글에서는 지진을 대비하기 위해 도시 디자인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세계 주요 도시의 사례와 함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도시 디자인과 지진, 왜 연결되어야 하는가?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흔히 아름다움이나 심미성에 초점을 맞춘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시 디자인에서의 디자인은 훨씬 더 복합적인 개념이다.
건축물의 배치, 도로의 흐름, 인프라의 분포, 대피 공간의 위치, 공공시설의 기능 등 도시 전반의 구조와 기능을 계획하는 것을 말한다. 지진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자연 현상이다. 하지만 그 피해의 크기와 양상은 도시가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같은 규모의 지진이라도 도로가 막히거나 대피소가 부족한 도시는 패닉에 빠지기 쉽고, 소방차와 구조대가 접근하지 못하는 밀집형 도시는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유발한다. 즉, 도시 디자인은 단순한 미관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지진을 견디는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도시의 DNA부터 지진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내진 설계를 넘어선 ‘도시 구조의 회복탄력성’
전통적으로 지진 대비의 중심은 건축물의 내진 설계였다.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하자' 이것이 기본 전략이었다.
물론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패러다임은 건물 하나가 아닌, 도시 전체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초점을 맞춘다.
즉, 지진이 발생했을 때 도시가 얼마나 빠르게 기능을 회복하고,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느냐가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회복탄력적인 도시는 다음의 요소를 갖춘다.
- 분산형 인프라: 전기, 수도, 통신, 도로망이 집중되어 있지 않고 분산되어 있어야 한다.
한 곳이 무너져도 나머지가 대체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중앙집중에서 벗어난 응급 시스템:
모든 병원이 시내 중심에 몰려 있다면, 도심이 피해를 입었을 때 구조가 마비된다.
지역 기반의 소규모 응급 시설이 곳곳에 배치되어야 한다. - 도시 내 대피 네트워크: 모든 시민이 도보 5~10분 내에 접근할 수 있는 대피소가 있어야 하며,
그 대피소로 연결되는 통로가 낙하물이나 붕괴에 안전한 구조여야 한다.
도로, 광장, 공원이 ‘생존 경로’가 된다
지진은 구조물뿐 아니라 교통망에도 심각한 타격을 준다. 도로가 끊기고, 다리가 무너지고, 고가도로는 붕괴된다.
이로 인해 구조대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피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따라서 도시 내 주요 도로망은 지진 시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내진 도로’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내진 도로란 진동과 균열에 견디는 재질로 포장하고, 전신주와 고가 구조물을 일정 거리 이상 떨어뜨려 배치하는 방식이다.
또한 광장과 공원은 단순한 여가 공간이 아닌, 중요한 생존 공간으로 기능해야 한다.
일본 도쿄의 경우, 대규모 공원은 지진 발생 시 화재 대피소, 급식소, 응급 병원, 임시 화장실 등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서울의 경우도 한강변 공원과 대규모 체육시설 등을 지진 대피 복합시설로 전환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즉, 도시는 평상시와 재난 시의 이중 기능을 동시에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고층화·밀집화의 한계, 도시 리디자인이 필요하다
현대 도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고밀도화’이다.
특히 대도시는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어 하나의 구조물이 붕괴되면 연쇄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대피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으며, 응급 차량 진입조차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따라서 도시 디자인에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요구된다.
- 건물 간 이격거리 확보: 지진 시 건물끼리 충돌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한다.
- 중층 건축의 확대: 고층 대신 중층 건물이 분산되어 있는 형태가 유리하다.
- 다양한 대피 경로 확보: 1층 로비가 좁거나 출입구가 하나뿐이면 대피에 어려움이 생긴다.
각 동마다 복수의 출입구와 외부 연결 계단이 필요하다. - 지하 공간 활용 재설계: 지하상가, 주차장, 지하철 등은 특히 지진에 취약한 공간이다.
비상 탈출 경로와 방수·환기 시스템을 보강해야 한다.
미래형 도시의 모델: 지진을 고려한 설계 사례들
세계적으로 지진을 고려한 도시 설계 사례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시 몇 가지를 소개한다.
- 일본 고베시
1995년 고베 대지진 이후 도시 전역이 리디자인되었다.
도로망을 재배치하고, 지역 사회 중심의 방재 커뮤니티를 구축했다.
고베시의 모든 초중고등학교는 지진 발생 시 자동으로 개방되는 대피소로 설계되어 있다. - 샌프란시스코
미국 서부의 대표적인 지진 위험 도시로,
지하수관, 전력선, 통신망을 분산형으로 재구성했다.
또한 시민들은 각자 ‘방재 백팩’을 갖추고 있으며,
도시는 시민 참여형 방재 교육을 주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2011년 지진 이후, 시청사와 도서관 등 주요 공공시설을
내진+면진 구조로 재건축했다.
도시 중심에 광장을 재정비하고,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대피 동선을 익히도록
도시 안내판까지 모두 교체했다.
이처럼 지진을 겪은 도시들은 단순한 복구가 아닌, 재설계와 회복탄력성 확보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 설계, 가장 중요한 안전망
도시 디자인은 전문가들만의 몫이 아니다. 지진에 강한 도시는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도시다.
건물 하나하나가 어떤 구조인지, 우리 동네 공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대피소는 어디에 있고, 그곳까지 가는 경로는 어떻게 확보되어야 하는지 이 모든 정보는 시민에게 공유되어야 하며, 시민은 그것을 활용해 자기만의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많은 도시들은 여전히 ‘일반적 도시 설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지진 대응형 도시 설계’라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 기술뿐 아니라 정책, 행정, 시민 교육이 함께 연동되어야 진정한 ‘지진 안전 도시’가 될 수 있다.
마무리하며
지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도시 디자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도시가 지진에 약하다면, 그 책임은 지진이 아닌 설계의 부재와 대비의 부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건물 하나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시 전체의 기능을 다시 설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래 세대를 위한 진정한 안전 자산이 될 것이다.
지진은 언제든 다시 올 것이다. 그때, 우리 도시가 재난에 무너지지 않고, 시민을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절반의 승리를 거둔 셈이다.
다음 글에서는 “지진파(P파·S파)의 특징과 이동 속도 비교”를 주제로 지진 발생 시 지각을 통과하는 두 가지 주요 지진파가 어떻게 다르고, 이 차이가 경보 시스템과 피해 예측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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