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지하에서도 지진이 일어나는 이유
우리는 흔히 지진을 '지표 근처에서 발생하는 흔들림'으로 기억한다.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놀라 피신하는 모습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반복적으로 접해온 장면이다. 이러한 지진은 대부분 지표에서 70km 이내에서 발생하며, 이를 ‘천발지진(淺發地震, shallow-focus earthquake)’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지표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깊은 지하에서 발생하는 지진도 존재한다. 이른바 '심부 지진(深部地震, deep-focus earthquake)'이다.
이 글에서는 일반인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지하 300km, 심지어 600km 이상 깊이에서도 발생하는 심부 지진이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질학과 지진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본다.
심부 지진, 상식의 경계를 넘는 현상
심부 지진은 정의상 진원 깊이가 300km 이상인 지진을 의미한다. 가장 깊은 곳에서는 700km 지점에서도 발생이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 깊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지진의 ‘발생 조건’과는 맞지 않는 장소다.
지진은 대개 지각판의 경계에서 판과 판이 서로 밀고 당기며 마찰이 쌓이다가, 그 응력이 임계치를 넘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마찰과 파열은 단단한 암석층에서 발생할 수 있으며, 지각이나 상부 맨틀에서는 그러한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
하지만 300km 아래는 이미 지표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압력과 온도는 극도로 높고, 암석은 점성이 높아져 흐물흐물한 유체적 성질을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찰에 의한 파열’ 메커니즘이 작동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고, 때때로 지표에서도 그 여진이 감지될 만큼 강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과학자들은 이 신비로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가설을 제시해왔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다음 두 가지다.
첫 번째 열쇠: 상전이 이론
첫 번째는 상전이(phase transition) 이론이다. 이것은 섭입대에서 해양판이 대륙판 밑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지구 내부 깊숙한 곳까지 이동할 때, 그 안의 광물 구조가 급격히 변하면서 발생하는 지진이라는 설명이다.
지각을 구성하는 주요 광물 중 하나인 올리빈(olivine)은 높은 온도와 압력 환경에서 스피넬(spinel) 구조로 바뀐다. 이 과정은 부피 수축과 함께 암석 내부 응력 분포를 크게 바꾼다. 만약 이 변화가 매우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면, 그로 인해 강한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상전이 지진은 심부 지진의 대표적 원인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일부 깊은 지진의 진원에서 지진파 특성이 상전이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들이 수집되고 있다.
다시 말해, 지하 깊은 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구조 변화가 단순한 변형이 아니라 폭발적 에너지 해방을 동반하며, 그것이 지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열쇠: 탈수 반응 이론
두 번째 이론은 탈수 반응(dehydration embrittlement)에 주목한다. 해양판은 섭입되기 전 바다 밑에서 다량의 수분을 포함한 퇴적물, 공극수, 점토 광물 등을 품고 있다. 이 수분은 섭입 과정에서 판 내부로 스며들어 있다가, 지하 깊은 곳에서 높은 압력과 온도에 의해 물 분자 형태로 방출된다.
이때 물은 암석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고압 상태에서 수분이 돌연히 빠져나오면 그 압력 균형이 깨지고, 결과적으로 암석이 갑작스레 파열된다.
이런 반응은 지표 근처보다 오히려 깊은 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며, 물의 존재가 없는 지층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결국 탈수 작용도 섭입대 지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실제로 심부 지진의 상당수는 이런 수분 방출로 인한 물리적 불안정성이 기폭제가 되어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심부 지진의 주요 발생 지역
심부 지진은 지구상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현상은 아니다. 주로 환태평양 조산대나 해양판 섭입대에서 집중적으로 관측된다. 일본 동부, 인도네시아 해역, 피지와 통가 지역 등은 대표적인 심부 지진 발생지다.
특히 일본의 도호쿠 해역에서는 600km 이상의 깊이에서도 M7 이상의 지진이 발생한 바 있다.
또한 2013년, 러시아 오호츠크해 아래 약 609km 깊이에서 발생한 M8.3 규모의 심부 지진은 매우 넓은 지역에서 감지되었다. 도쿄, 베이징, 서울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와이까지 진동이 감지되었다. 이처럼 심부 지진은 작은 국지적 파괴는 없을지라도, 광역적 영향력을 가진 지진이다.
피해는 없지만 중요한 단서
흥미롭게도 심부 지진은 대체로 지표면에 큰 피해를 주지 않는다. 진원이 너무 깊기 때문에 대부분의 에너지가 전파되는 동안 감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진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지진파는 지하를 통과할 때 지층의 밀도, 조성, 상태 등에 따라 속도와 경로가 달라진다. 심부 지진에서 발생한 P파와 S파, 표면파는 지구 내부를 여러 방향으로 통과하면서 지구 내부 구조를 스캔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이 파형을 분석해 지구의 중심부 구조, 맨틀의 흐름, 판 경계의 성질 등을 추론한다.
즉, 심부 지진은 자연이 인류에게 제공한 지하 레이더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지하 수백 km의 세계를, 이 진동 하나로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구 내부는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심부 지진은 단순히 '깊은 곳에서 일어난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 내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동적 시스템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표면에 서 있지만, 그 아래 수백 킬로미터 깊이에서도 지구는 끊임없이 긴장을 쌓고, 폭발하고, 재구성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진을 단순히 지표의 파괴적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땅속에서 발생하는 이 거대한 파동은 지구라는 행성의 생동감을 드러내는 맥박이다. 그리고 그 맥박은 인간의 생명, 도시의 구조, 나아가 문명의 안전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다음 편에서는 “지진은 왜 소리처럼 들릴까? 진동이 아닌 청각 현상”이라는 주제로 이어집니다.
지진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종종 '쿵', '웅', '울림'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 소리는 건물의 떨림일까요, 아니면 땅 자체가 내는 소리일까요? 지진파와 인간의 청각이 만나는 지점, 지진과 소리의 흥미로운 관계를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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